중국 공산당

 


<color=#ffd700> '''중국 공산당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중국 공산당'''
'''中国共产党 / 中國共産黨'''
'''Communist Party of China'''

[image]
[image]
'''당기'''
'''문장'''
'''약칭'''
中共党, 중공, CPC, CCP[1]
'''창당일'''
1921년 7월 1일
'''창당자'''
천두슈, 리다자오
'''총서기'''
시진핑
'''정치국 상무위원'''
시진핑, 리커창, 리잔수, 왕양,
왕후닝, 자오러지, 한정
'''중앙 당사'''
중국 베이징 시 중난하이
'''당보'''
인민일보
'''청년조직'''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중국 소년 선봉대
'''군사조직'''
중국 인민해방군
'''국제조직'''

'''당원'''
약 1억명
'''슬로건'''
为人民服务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2]
'''전국인민대표대회'''
2,157석 / 2,987석(72%)
'''이념 · 정치노선'''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3]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A][4]
'''권위주의 전제 독재'''[A][5]
패권주의[A][6]
반서방[A][7]

과거의 이념
전체주의,(1935년~1978년),→ 권위주의 과두 독재,(1978~2012년),
마르크스주의,(1921년~1929년),→스탈린주의,(1929년~1935년),→마오주의,(1949년~1978년,[8]중국 특색 사회주의,(1978년~2012년),
'''정치적 스펙트럼'''
극좌(1921~1978)[9]
혼합정치(1978~현재)[10][11]
'''중국 공산당 뉴스포럼'''
1. 개요
2. 역사
2.1. 창당
2.3. 국공내전의 승리
2.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3. 구조
3.1. 전국대표대회
3.2. 중앙위원회
3.2.1. 역대 최고지도자
3.2.2. 정치국
3.2.2.1. 정치국 상무위원회
3.2.3. 산하 기관
3.2.3.1. 중앙위원회 서기처
3.2.3.2. 중앙기율검사위원회
5. 당원
6. 비판
6.1. 일당 독재
6.2. 인권 탄압
6.3. 분리주의 탄압 및 독립운동 방해
6.4. 종교 탄압
6.5.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
6.6. 테러단체 지원
6.7. 역사 왜곡
7. 관영언론
8. 여담
9. 관련 문서
9.1. 민국시기
9.2. 건국 이후
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2], #[13]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천두슈[14], 리다자오의 주도하에 창당됐다. 1949년부터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중국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집권정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에는 공산당 말고도 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하려 하지도 않는다.
약칭은 '''중공'''(中共).[15]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 일당제인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곧 중국 공산당이기 때문에[16], 다른 나라에서 자국 중앙 및 지방 정부를 단순히 "중앙 정부 혹은 지방 정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대륙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이 곳을 가리킨다. 당원은 9,000만 명 이상이다.[17]
'전국대표대회'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18]
현 당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시진핑'''.

2. 역사



2.1. 창당



중국의 영화 《건당위업》의 한 장면.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창립자는 천두슈)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해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19] 초기에는 1921년 노동조합서기처를 설립,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를 조직, 후원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처음에는 광동군벌 천중밍, 직예군벌 우페이푸 등과의 합작을 도모했으나 천중밍과는 영풍함 사건으로, 우페이푸와는 2.7 사건으로 결렬했으며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1차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의 건설을 도왔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운동을 선동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공산당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며 국민당을 잠식하려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공간의 갈등이 끓어올랐고 이런 갈등은 쑨원이 사망한 후에 폭발했다.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암살되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구실로 후한민, 쉬충즈,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했다. 장제스는 이 숙청에 가담하면서 국민당의 2인자로 자리잡았지만 북벌 문제를 놓고 공산당과 갈등을 빚었고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하지만 국공 갈등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난징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결국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7년 5월, 하두인을 비롯한 우파 장령들이 마일사변을 일으키며 분공을 요구했고 펑위샹도 분공을 요구, 거기에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내려오게 되면서 1927년 7월에는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도 결별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시작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 때문에 '''8.7 긴급회의를 통해 천두슈가 실각하고''' 취추바이가 집권하여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주도했으나 역시나 실패했다. 12월 광저우 폭동의 실패의 결과로 6만에 달하던 당원이 1만명으로 급감하는 등 공산당의 피해는 심각했다.

2.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과 대장정


하지만 마오쩌둥주더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중국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했으며 특히 강서성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는 계속 확장,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상하이의 임시 당중앙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마오쩌둥은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라 불리는 소련 유학파들이 군사 노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 지구들이 분쇄되었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했다.
1934년 공산당은 대장정에 올랐으며 1935년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복귀했다. 이후 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분쟁이 있었으나 사천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장궈타오의 4방면군이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하면서 마오쩌둥의 우위가 확실해졌고 마오쩌둥은 섬서성 연안에 정착하였다. 2차 양광사변을 즈음해서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장제스에게 항일을 위해 화해하자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쉐량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 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2.3. 국공내전의 승리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태평양 전쟁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공산당의 중심지였던 산시 및 화북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었고 더욱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동남부해안에 집결해있는 일본군과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틈을 노려 화북지역을 공산당이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이후 공산당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무려 120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본의 실수가 중국공산당에게 하늘의 기회를 준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소련은 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지역을 발빠르게 장악하여 만주지역에 주둔한 관동군을 조선반도로 몰아내었다. 소련이 전후 만주를 중국 공산당에게 양도한다는 약속을 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어쨌든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국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세력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재로 두 당 사이에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공산당 토벌을 목표로 선공을 가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중국 공산당은 내전 초기 연전연패하면서 본거지인 옌안까지 함락당할 정도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류보청덩샤오핑이 거느린 대군이 게릴라전으로 중원에서 국민당의 본거지인 난징-상하이 부근에서 북부로 가는 보급을 방해하면서 1947년 겨울에 만주에서 국민당의 50만 대군에게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여기에 장제스가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군비에 몰빵하는 재정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독이 되어 난징-상하이 지역의 경제가 붕괴하면서 이후 공산당은 기세를 몰아서 국민당을 몰아붙여서 1949년 중국 국민당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본토를 대부분 장악한다.[20]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공산당 창립 초창기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1차 대회의 중국 공산당 소속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 활동 중 전사하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이나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다만 두 명은 중공 정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재입당이 허용되어 이후 대륙에서 관리로 일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국 국민당과 더불어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본토와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보내주었고,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부분적으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처럼 이념과 상관없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21][22]

2.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마오쩌둥 집권 당시에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으나, 대륙 시절의 중화민국보다는 대륙을 그럭저럭 운영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덩샤오핑 이후 개방개혁 정책이 효과를 봐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23][24] 물론 빈부격차나 부정부패, 오염 문제도 상당히 크고, 중국인들도 정치에 관한 불만이 없는건 아니지만[25]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 시기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26] 그 이후부터는 언론의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 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 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상기에 언급된 지방행정의 비리나 부조리, 환경오염 등은 중앙정치에 있어서도 손해가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지방 부정의 불만이 쌓이다 보면 결국 각 지방에서 동시적으로 터지는 불만을 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중앙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2천년대 중국이 이렇게 좀 유연해진건 원자바오 등 나름 온건한 그 시절 중공 지도자들의 스타일 덕분도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진핑 정권이 출범하면선 다시 악화되고 있다. 사실 악화라는 것도 좀 웃긴게 마오쩌둥 심지어는 국부천대 이전 장제스 정권 시절에도 중국은 사실상 독재 시기로, 국민(인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야 대만이 중화권에선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평가받지만, 그건 장제스 독재 시절에 대항한 민주파들의 공이 크고, 국공내전 당시만 해도 사실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넘이 그넘으로 보일 여지는 다분했다. 게다가 먼저 집권한 집권당의 특성상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부패정당이란 낙인이 찍혀버렸고, 당시만 해도 약자를 위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택동의 공산당은 일반인들이 혹할만한 정당이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의 당내 역할만 보면 후진타오 집권 시기까지는 일본 자민당과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도자의 결정보다는 계파들 간의 합의나 원로 영향력이 더 큰 편 이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부터는 사실상 북한조선로동당에 더 가깝다고 보면 된다. 뭔 소리냐 하면 최고 지도자의 거수기란 거다.

3. 구조



[image]
[27][28]

3.1.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전 공산당원 중 3000명 정도를 대표로 뽑아 5년에 한 번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나 전국 성급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개최할 수 있다. 아래 위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차관급으로 예우한다.

3.2. 중앙위원회


전국대표대회에서 370명 가량을 뽑아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중국 공산당의 대표다.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2가지로 구분된다.

3.2.1. 역대 최고지도자


중국에서는 중공중앙주요부책인(中共中央主要负责人)[29]이라고 한다.

3.2.1.1.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 제1대: 천두슈 (1921 ~ 1927)(제1차 중앙국서기, 제2~4차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제5차 중앙위원회총서기)
    • 임시: 취추바이 (1927 ~ 1928)(임시 중앙위원회 총서기)
  • 제2대: 샹중파 (1928 ~ 1931)(제6차 중앙위원회총서기)
    • 대리: 왕밍 (1931)(6차 중앙위원회총서기 대리)
  • 제3대: 보구 (1934 ~ 1935)(제6차 임시중앙정치국부책인)
  • 제4대: 장원톈 (1935 ~ 1943)(제6차 중앙위원회 총서기)[30]
  • 제5대 : 마오쩌둥 (1943 ~ 1945)(제6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정치국 주석)

3.2.1.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 중앙위원회 주석 (1945-1982)
    • 제5대: 마오쩌둥 (1945.06.19. ~ 1976.09.09.)(제7-10차 전국대표대회)
    • 제6대: 화궈펑 (1976.10.07. ~ 1981.06.28.)(제10-11차 전국대표대회)
    • 제7대: 후야오방 (1981.06.29. ~ 1982.09.11.)(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현재)
    • 제7대: 후야오방 (1982.09.12. ~ 1987.01.16.)(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 대리: 자오쯔양 (1987.01.16. ~ 1987.11.01.)(제12차 전국대표대회)[덩]
    • 제8대 : 자오쯔양 (1987.11.02. ~ 1989.06.23.)(제13차 전국대표대회)[덩][31]
    • 제9대: 장쩌민 (1989.06.24. ~ 2002.11.14.)(제1315차 전국대표대회)
    • 제10대: 후진타오 (2002.11.15. ~ 2012.11.14.)(제16-17차 전국대표대회)
    • 제11대: 시진핑(2012.11.15. ~ 현재)(제18-19차 전국대표대회)

3.2.2. 정치국


중국 공산당을 지도하며 정책을 토의·결정하는 기관으로써 중앙위원회 위원 중 25명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는다. 부총리급으로 예우되는데 예외적으로 당 서열 8위인 국가 부주석은 부통령급이고 9위인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는 총리급으로 본다.(단 정치국원이나 정치국상무위원 겸직일 경우해당)
또한 이들 25명도 당서열이 앞서나 그중 7명은 사실상 권력 서열 최고 정점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된다.
다음은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겸임되는 공직 리스트이다.
  •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
  • 중앙위원회 사무처장
  •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수석부위원장
  • 국무원 부총리
  • 직할시의 당위서기(베이징시, 상하이시, 톈진시, 충칭시)
  • 부총리급 성의 당위서기(현재 광둥성, 신장자치구)
  • 중앙정법위원회 서기[32]
  • 중앙군사위원회 서기[33]
  • 부총리급 중앙정책조정자문기구[34](현재 중앙외무사무처장)
  •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국가감찰위주임 겸임)
  • 부총리급 중앙위원회 소속 부의 부장(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3.2.2.1. 정치국 상무위원회

당과 국가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이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거로 선출된다. 선출된 7명의 위원은 정치국 상무위원로 불린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는 당연직이며, 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국무원 상무부총리, 중앙서기처 제1서기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로 대입하면 대통령 겸 당대표와 당 원내대표, 5부 요인(국회의장, 국무총리, 대법원장, 헌재소장, 선관위장)과 국회 법사위원장, 감사원장과 경제부총리와 방통위장이 서로 만나 국가 중대한 사항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기구나 마찬가지이다.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군사위원회 주석은 대통령급이고(현재 시진핑이 3석을 겸임하고 있다) 나머지 6인은 총리급으로 예우받는다.
'68세 이상은 상무위원을 맡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七上八下)이 있다. 시진핑이 68세를 넘은 자신의 오른팔 왕치산을 상무위원으로 유임하여 이걸 깨려 한다는 관측이 있었는데 일단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대신 국가 부주석으로 삼았다.
<현 19대 정치국 상무위원회>
※ 다음 인물들이 상무위원(당직)이며 별도의 직책을 겸임한다.
  • 시진핑 : 중앙위원회 총서기(당직), 국가 주석(국가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당직)
  • 리커창 : 국무원 당조서기(당직), 국무원 총리(국가직)
  • 리잔수 : 전국인민대표대회 당조서기(당직),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국가직)
  • 왕양 : 정치협상회의 당조서기(당직),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국가직)
  • 왕후닝 : 중앙서기처 제1서기(당직)
  • 자오러지 :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당직)
  • 한정 : 국무원 당조부서기(당직), 국무원 수석부총리(국가직)

3.2.3. 산하 기관


  • 중앙직속기관: 중앙판공청, 중앙조직부[35], 중앙선전부, 중앙통일전선부[36], 중앙대외연락부, 중앙당교 및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3.2.3.1. 중앙위원회 서기처

약칭은 중앙서기처로 중앙위원회 사무 처리가 주된 업무이다. 서기는 제1서기를 포함해 총 7명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곳 제1서기는 당의 부당수이면서 원내대표겸 당 사무총장이나 다름없다.

3.2.3.2.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공무원의 부정부패, 비위행위를 감찰하는 기구로써 서기(1인), 부서기(8인), 상무위원 19인(서기와 부서기를 포함) 구성원이 이루어진다.

3.2.3.3. 중앙군사위원회

중국 공산당의 중국군 통제기관으로 군 통수권을 지닌 '''실세 권력기관'''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4. 파벌




5. 당원


[37]
중국 공산당의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우선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약칭 공청단)이라는 예비 조직에 들어간 뒤에 약 3년이 걸리는 능력 검증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체제를 유지하고 당 내의 세대 교체를 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증가 추세다.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정경유착도 상당히 심각하다. 더군다나 정부와 기업, 민간이 힘을 합쳐 그것을 덮기 위해 사실상 통제한다고 보면 된다.
공산당 최상층부에는 '''태자당'''이라 불리는 개국공신의 2세, 3세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공청단'''에서 제도적으로 고급 당료가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기 때문에 태자당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자당과 공청단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상호견제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통 태자당이고,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출신.[38]
여기에 지방조직[39]에서 실력을 검증받지 못하면, 최고위직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아무리 부모 덕을 보더라도 20대 중반부터 시작하는 당조직 말단에서 30년 안에 4-5 단계의 직위를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고속승진'''해야 상무위원(정원7명)의 후보자로 들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정원 205명)에 진입할 수 있다. 개인 비리에 연루되거나 혹은 실적이 나쁘다면 낙마. 장쩌민도 80년대 상하이에서 부정부패 문제로 날아갈 뻔 했다가 보이보[40]의 구원으로 살아남은 바 있다. 2013년에 출범한 중국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7인 상무위원회의 멤버를 봐도 시진핑만이 개국공신 아버지의 덕을 볼 수 있었던 정통 태자당이며, 나머지 6명(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은 공청단 출신이거나 태자당이라고 해도 부모의 배경과는 거의 무관하다. 태자당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부모는 대장정 이후와 공산화된 1949년 사이에 당 고위직에 진입한 자들로서 대략 800여명-1000명이나 되므로 이들의 자녀 수천 명이 모두 고위직에 들어갈 수는 없다. 결국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 덩샤오핑의 9자녀들 가운데서도 장관급까지 오른 자는 전국 정협 부주석 덩푸팡 뿐이며, 이 자리도 거의 장애인 할당으로 얻은 자리다.[41]

6. 비판



6.1. 일당 독재


독재가 나쁘다는건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시민이라면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다만 중국인 공산당원의 시점에서 보자면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당연한 체제다. 왜냐하면 공산당의 독재(专政)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 제1장 제1조 제1항[42][43]에 명기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쉴드치는 사람들은 일당독재보다 더한 전제왕정도 중동같은 곳에선 남아있는 판국에 일당독재 역시 인류가 만들어 낸 하나의 정치 체제일 뿐이지 절대악이라고 볼 순 없다는 주장도 한다. 실제 현 중국 정부는 민주화 이후 사회적 혼란과 분열이 왔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동,중부 유럽의 사례 등을 예시로 들면서[44]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근현대 사회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민주주의이고 그 민주주의 핵심은 선거다당제, 특히 서로 견제를 하는 분권적/분극적 다당제를 지향하는 것을 감안하면[45] 이런 논리는 그럼 일당독재 말고 중국 공산당이 그렇게 까는 전제군주정 시절 역시 장단점이 있으니 그리로 돌아가자는 말로도 귀결될 수 있기에 현대엔 맞지 않는 주장임은 확실하다. 심지어 그 일당독재조차 지금은 일인독재로 추락하는 형국이니..
당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석 숫자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다른 정당은 아무리 의석이 많아봐야 70석을 넘지 못하는데 '''혼자만 2100석을 넘는 거대한 의석 숫자'''로 악명 높다.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이 아무리 막나가도 다른 정당들이 이에 대한 제동을 걸지 못하는 형국까지 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후술할 여러가지 비판들이 난립하게 되는 지경까지 갔다.
한마디로 태생적으로 '''견제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었고''' 이는 아래의 비판 요소들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중국 내부에선 공산당 내부의 파벌이 서로 견제를 하고 민주당파를 뒀기에 일당 독재가 아니라는 궤변으로 여론을 단속하고, 실제로도 '''명목상으로는''' 일당 독재가 아니긴 하나, 위에서 말한 듯이 '''무려 90% 이상을 중국 공산당이 차지하고'''[46], 그나마 있는 민주파 야당과 무소속조차도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이기에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식 일당 독재다. 게다가 그 파벌의 견제 문제도 시진핑 집권 이전까지는 몰라도 시진핑 집권 이후엔 사실상 '''일인 전제 독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아래의 비판 요소는 더욱 심각해진 상황.

6.2. 인권 탄압


일당 독재에 대한 반대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적대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과 인권 운동가들을 "국가 전복 혐의" 또는 "허위사실 유포"로 체포하며 몇 년간 가두는 건 예사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서명이나 항의와 같은 평화적인 민주화 운동을 했음에도 국가전복선동혐의로 체포되어 11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암이 악화되어 말년에 겨우 나와 치료를 받다 사망했으며, 이 외에도 여러 인권운동가들이 체포되어 "국가전복선동", "허위사실유포"와 같은 어거지 혐의로 수년 이상의 중형을 받고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공산당임에도 불구하고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탄압한다.(...)#, # 일단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독립된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결성하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는 불법이다. #, # 아예 노동자들을 우파로 몰기도 한다.
UN에서 추진되던 인권결의안에도 여러차례 반대를 날렸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47] 터키시리아 쿠르드 침공 규탄 2차례 반대(#), 시리아 아사드정권의 민간인학살 규탄 및 퇴진요구 반대, 시리아인도지원 결의안 거부권 행사(#), 미얀마로힝야족 대량학살 법적 처벌 반대(#) 등이 있다.
기타 자세한 것은 중국/문화 검열, 중국/인권, 중국/정치 문서도 참조.

6.3. 분리주의 탄압 및 독립운동 방해


특히 티베트인들과 위구르인, 최근에는 중국 내 몽골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에는 "분리운동"이라며 강경대응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중국측 표현으로는 분리주의 운동가)들을 몇 년씩 옥에 가두는 것은 예사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중국의 탄압은 매우 선제적이고 철저하다. 다만 이렇게 선제적이고 철저히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전이나 유혈사태로 비화하지 않는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싹이 보이면 무조건 잡아 가두기 때문. 딱히 독립운동이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독립이나 분리주의를 조장할 수 있는 발언을 한 사람은 수년씩 코렁탕을 먹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방 언론과 당국 허가없이 인터뷰를 한 티벳어 언어 보전 운동가는 징역 수년을 살기도 한다. #
중국은 특유의 강제적 행정력으로 분리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소수민족, 특히 티베트족위구르족, 최근에는 내몽골 자치구에 거주하는 몽골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웬만한 소수민족 지식인들은 대부분 사찰을 받고 있으며, 분리주의 경향이 심한 소수민족의 집회는 비정치적이더라도[48] 꼭 감시원들이 따라붙는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소요사태가 나면 유혈진압도 불사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다민족 국가에서 특정 민족의 독립이나 분리주의 운동은 내전 및 국가 분열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터키, 인도네시아, 러시아, 인도, 에스파냐 등 다수의 다민족국가들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다양한 형태로 탄압하고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을 딱히 중국 공산당 자체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기는 하다. 중국 공산당의 동화정책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6.4. 종교 탄압


종교에 대해서는 헌법상으로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국가가 통제하고 있고, 특히 국가적으로 사교로 지정된 파룬궁동방번개는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다.[49] 중국은 역사적으로 체제가 뒤집힐 뻔한 엄청난 종교민란을 겪었기 때문에(황건적, 홍건적, 태평천국), 교주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엄격한 면이 있는데다, 서방과 이어진 외래종교인 가톨릭개신교, 소수민족 독립운동과 연결된 이슬람교는 불교에 비하면 더더욱 경계하는 편이다.[50]
그 원인을 말하자면, 근대 서양 열강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대에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과의 대립 때문에 기독교를 서방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중국에서도 수백년 역사를 가지는 것이며, 중국의 국부로 존경받는 쑨원[51] 또한 기독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잘못된 주장이다. 각 왕조나 공산정권 수립 이후 상당한 탄압을 받았음에도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어느 정도 제한이 풀어졌기 때문에 신자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개신교 신자는 4천만명 내외, 가톨릭 신자는 500만에서 1200만 내외로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기원되었지만 이미 중국 현지에서 오랜 시간의 현지화를 거쳤기 때문에 단순한 종교가 아닌 문화와도 연결시켜 홍보하는 분위기고 다른 종교들보다 은근히 눈감아주는 편이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탄압한다.
이슬람교위구르족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라마단 행사를 금지시키고 금식 기간인 라마단 기간에 음식을 먹도록 강요한다. 부르카는 인권 탄압 논란이 있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턱수염, 터번히잡까지 금지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카같이 극단주의자들과 연관이 깊은 풍습들만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문서 참고. 중국의 이슬람 탄압은 위구르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편인데 신장위구르의 이슬람 탄압은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이라고 치더라도 중국 공산당에 협조적인 회족들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동안 회족에 대해서는 심하게 터치하지 않았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로는 회족에 대한 종교 규제도 강화되어 스피커를 이용한 아잔 낭송 금지, 모스크 지붕 모양 규제[52], 아동 대상 이슬람교 교육 금지등의 규제 명령이 하달되어 시행중이다. 중국의 이슬람교에 대한 규제와 탄압때문에 중동 지역 무슬림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편이다. 탄압받는 중국 무슬림 신자들의 추가 증언[53]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다독일 필요도 있기 때문에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다른 혜택도 받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쇠고기/양고기 보조금도 지급받고, 계획생육정책이 잘 집행되지 않으며[54], 일상생활에서 한족들과 분쟁이 생기면 독립운동 같은 것으로 불거져서 모가지의 염려가 있는 지방정부 등은 위구르인들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허나 이 소수민족들에 대한 일부 혜택과 편의는 '''소수민족에 대한 혜택'''이지 무슬림에 대한 혜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이슬람에 호의적이라는 근거로 들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55]
원칙적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되려면 무신론자여야 한다. 즉, 당내에 종교를 가진 사람은 없고, 종교를 믿는다면 가입할 수 없다. 그런데 건국 초기에는 위구르족, 티베트인을 회유하기 위해서 해당소수민족은 이슬람교인들과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민족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받아준 모양이다. 한족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당초기부터 받아주지 않았다.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이라는 1930년대 옌안 해방구 르포를 보면,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같이 일하는 기독교 목사가 있었으나 당에 가입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겉으론 무신론을 내세우며 종교를 탄압하는 중국 공산당이지만, 고위층들은 풍수지리를 비롯해 다양한 미신과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당장 당 주석인 시진핑부터 풍수지리의 신봉자라고..
이와 별개로 종교를 싫어하는 반종교주의성향의 인물들은 중공이 싫어도 종교탄압에 대해서만은 중공에 호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진핑의 우상화요소가 있어서 문제지...[56]

6.5.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


중국 역시 정경유착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다보니 정치적 후견인이 권력 투쟁에서 패해 몰락하면 기업 그룹도 해체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보시라이와 유착되어 있던 다롄 스더 그룹. 중국 당국도 부패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있는지 시진핑 주도로 반부패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지만, 이것도 제식구 감싸기와 일인독재를 완성하기 위한 정적 찍어내기 등의 비난이 있다. 그래도 보여주기식이라도 사정의 칼날이 부는건 사실이라 이전에 비해 일선 공무원들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뒷돈받는 일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57] 연장선상인지 해외 외화송금이 시진핑 집권 이후 매우 까다로워졌다.

6.6. 테러단체 지원


또한, 자기네 나라 안에선 이슬람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하면서 뒤에서는 탈레반을 몰래 지원해왔는데, 2019년에 화웨이가 2000년부터 탈레반에게 통신기술을 지원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탈레반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파키스탄에 이어서 탈레반을 지원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후진타오장쩌민 시절에는 탈레반과는 선을 긋고 은근 슬쩍 미국의 탈레반 견제를 방해했지만, 시진핑은 자기가 추진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점령지를 지나가야 하니까 일대일로 정책을 위해 아예 탈레반과 알게 모르게 손을 잡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6.7. 역사 왜곡


사실 공산당 핵심부가 관여하고 있다고 보긴 좀 관심도가 떨어지는 이슈긴 하지만[58], 동북공정 관련해 고구려를 자기나라 역사라고 우기거나[59] 광개토왕비를 ‘중화민족의 비석예술’로 표현하는 등 역사 왜곡을 해 비판받기도 한다.
2017년 동북아역사재단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중국 집안시 장군총 상가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고구려 문화재 유적 관광지는 (중략) 여기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온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으로 불리는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가 있고…"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고구려를 한국이 아닌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왕의 능비다. 한국 당국은 해당 안내판에 대해 지난 7월 중국 정부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아직 협의 중이라는 말만 들리는 것을 봐선 수정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60]
그 외 북경시 수도박물관은 전시실 초입부 전시패널에 한반도 전체를 '제국'으로 표시한 지도를 게시했다. 그러면서 다른 패널의 19세기 세계형세도에 '조선'이라고 적힌 글자 아래 '일점(日占)', 즉 일본에게 점령됐다는 의미의 글자를 써놓았다.

7. 관영언론


  • 인민일보 (런민르바오)
  • 환구시보 (환추스바오)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半)관영이다. 꼭 인민일보나 중국 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적는 인민일보가 점잖은 논조를 표방한다면 환구시보는 그와 정반대로 상당히 국수적인 논조를 나타낸다.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신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산당 내 극성파들의 속내가 어떠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한 편. 환구시보는 영어로 치면 글로벌타임스 정도 된다. 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61]

8. 여담


2016년 기준으로 창당된 지 95주년을 맞이하였다. 관련 기사. 백 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관련 기사.
공산당 혁명원로의 후손들을 훙삼다이라고 부르는데 안하무인스런 태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꽤 있어 대중의 시선이 안좋은 편이다.
중국 본토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전쟁이다. 신생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데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민해방군이 아닌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실질적인 한반도 반 통일 세력. 다만 이때 중공의 참전은 유엔군 정확히는 유엔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당시 미군 사령부의 오판도 있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 수뇌부는 38선 남쪽의 유엔군 활동은 보장해주지만, 북쪽으로 넘어오는 순간[62] 개입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는데 이때 중공의 전력을 우습게 본 맥아더를 비롯한 수뇌부는 진격을 계속했고 결과는 알다시피.. 사실 당시 남측 수뇌부의 더 핵심적인 문제는 중공 전력의 과소평가에 따른 전세 역전 후 대안 전략 부재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때 최강 미군을 막았다는 사실 때문에 청 말기 이후 2차세계대전까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취급받던 중국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올라간 측면은 있다. 그래서 중공도 미국과 마찰이 있을 때면 이 사건을 거론하며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띄우고 있는 것.
2010년대 들어 공자를 부쩍 띄우고 있다.# 캐나다 출신으로 칭화대 교수에 임명된 대니얼 A. 벨 같은 친중공 정치학자는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독재가 공자의 사상에 입각한 '동아시아판 철인정치'라며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규모 공동체라면 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나 중국처럼 수억명이 사는 대국에선 이른바 신유가식 현능정치가 최선이라는 것. 그는 20세기엔 서구식 민주주의의 경쟁자가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 소련의 공산주의여서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볼 수 있었지만 21세기에도 이 제도가 여전히 그런지는 회의감을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알아서 판단하자. 반론은 이 문서에도 많다. 다 떠나서 이 양반은 그래도 나름 현 인류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자기 딴엔 고심하는 것일테지만 현 중공이 이런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것 같지도 않다. 자기들 집권에 유리한 주장은 뽑아먹고 아니다 싶은 주장을 하면 가차없이 토사구팽시킬테니..
2020년 7월 21일에 영국을 방문중인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전세계가 중국 공산당의 위협에 대항해야 한다고 밝혔다.#
8월 22일 시진핑 주석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제명됐던 전직 중국 공산당 간부학교 교수가 CNN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공산당은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도올 김용옥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당독재 개념과는 좀 다르고 워낙 크고 체계, 토론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각 계파별로 서로 견제를 해서 오히려 다당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했다.[63][64] 허나 후진타오의 퇴임시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발언이나, 중국에서 원로한테 훈수 받는 제도나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 호랑이 4인방 같은 사례를 들면서 비리가 많다는 걸 말하기는 한다.
약간 옥시덴탈리즘이 있는 것 같다. 서구의 마돈나엠마 왓슨 같은 페미니즘이나 기타 인권 운동 활동가들이 중국을 비난하자 반 관영 언론사 환구시보를 통해 "중국 여성에 비해 금방 늙고 아줌마 되는 백인 여성들이 한물 가자 뒤늦게 히스테리 한풀이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상기되어있듯 환구시보는 완전히 중공과 일치하는 견해만 보이는 신문사는 아니긴 하다. 중공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인종주의, 성차별을 배척한다. 중공의 위선자적 면모 혹은 환구시보가 얼마나 저질스러운지 알 수 있는 한 대목.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이지만, 많은 소수민족을 품어야 하는 중공의 특성상 대한족주의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론 일단 내세우고 싶어도 내세울 수가 없다. 당장 마오쩌둥도 집권 당시 당내에 퍼져있던 대한족주의를 경계하며 프롤레타리아 민족정책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덕분인지 그 엄혹한 시절에도 의외로 소수민족들은 한족에 비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독립/분리운동하던 세력에겐 가차없었지만..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 7월 첫 방송을 목표로 ''''광영여몽상(光荣与梦想, 영광과 꿈)''''이 제작에 착수해 촬영이 진행 중이다. 해당 시리즈물은 1921년 제 1차 공산당대회부터 중국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불리는 6.25 전쟁(1950-1953)까지 이르는 대서사를 다루는 중국 특유의 '혁명적 사극'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 100주년 기념TV드라마.

9. 관련 문서



9.1. 민국시기



9.2. 건국 이후



10. 둘러보기




[1] Chinese Communist Party의 약자. 세계적으로는 CCP가 더 많이 쓰인다.[2] 중국어 服务의 우리말 발음은 '복무'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복무'는 주로 '군복무'와 같이 군생활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는 반면, 중국어의 服务는 일하다, 서비스, 봉사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북한조선인민군에서는 이 슬로건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를 직역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을 공식 행사 시 경례구호로 사용하고 있다.[3] 1929년 이후[A] A B C D 2012년~현재[4] 일명 '''시진핑 사상'''이라 불리기도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주의, 덩샤오핑 이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자칭한다. 사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체가 두루뭉술하다.[5] 개혁개방 이후로는 일당독재 하의 집단지도체제 즉 과두정 독재였지만, 2010년대 시진핑이 경쟁자들을 대부분 숙청한 뒤로는 사실상 일인독재가 시작되었다.[6] 현 중공에선 자신들은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에둘러 부정하고 있지만 맘에 안드는 국가에 희토류 제한 조치를 거는 등의 행태는 사실상 패권주의다. 이러다 보니 국수주의적 행태도 종종 보인다.[7] 주석이 누구인가에 따라 달랐다. 대표적으로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시절에는 서방이나 주변국들하고 원만하게 지내려는 노력도 했다. 사실 이는 시진핑도 이론적으론 일부 추구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중국 패권주의가 노골화되며 이상과 현실에선 차이가 커지고 있다.[8]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마오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기운도 있지만 강령에는 공식적으로 명시하고 있다.[9] 다만 이 극좌라는게 강경 생태주의, 아나키즘같은 그런 진보적 스펙트럼의 극좌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공산주의 체제였다는 소리.[10] 사회혁명을 통해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국유 경제체제가 수립된 중국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중국 공산당은 "권위주의적 국가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가 국유화된 체제"의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정책 방향은 현상유지를 전제로 국력 강화에 주력한다는 것으로, 자신들도 이 체제가 더 우월하답시고 해외로 수출하거나 현 상태에서 더 사회혁명을 진전시키고자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건 겉으로 내세우는 소리일 뿐이고, 중국 내부에선 은근히 자신들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식의 어필을 하고 있다. 거기서 노리는 것은 당연히 현 권력층의 권력 유지.[11] 참고로 공식적으로는 좌파정당으로 분류되지만, 21세기 현재의 중국 공산당이 타국의 공산당과 비슷한 '좌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동아시아 관련 언론인이자 작가인 '이안 부루마'는 지금의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좌파정당이 아니라 단지 권위적인 국가자본주의 정당일 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사회, 정치, 제도에서 사회주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있다.) 굳이 따져보자면 실용주의 노선은 다른 나라 좌우 정당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결국은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이 문제. 덕분인지 친중파(홍콩) 문서에도 적혀있지만 홍콩과 마카오에선 우파들이 되레 상대적 친중공 성향이고 오히려 좌파(=민주파)가 중국공산당과 더 큰 마찰을 빚고 있다.[12] SBS 보도[13] 연합뉴스 보도[14] 총서기로 취임하였다.[15] 1988년 이전까지 한국에선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아닌, 그냥 중국 공산당 당국 혹은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 중이던 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참고.[16]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은 별개의 조직이다. 중국 국내법상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라고 불리며, 이 국무원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다. 즉, 당이 국가기관보다 상위 기관이며, 법의 서열도 헌법보다 당헌이 우선된다. 그래서 공산당이 정부의 역할도 하는 이중정부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를 당국가 체제라고 한다. 이에 따라서 나무위키에서 중국 정부 문서는 중국 공산당 문서의 리다이렉트 문서로 존재한다.[17] 중국 인구의 약 6.4%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1위는 인도의 인도 인민당. 다만 중국 공산당은 일당독재로 가입수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음에도 안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부질없는 비교긴 하다. 참고로 당원 규모 세계 3위와 4위는 미국 민주당미국 공화당이다.[18]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19] 이중 저우포하이, 천궁보 등은 탈당하여 국민당에 합류했다.[20] 윈난성 등 일부 지역의 국민당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외부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1950년대 초반에 대부분 공산당군에 토벌된다.[21]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그렇게 적극적인 후원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국공내전이후 사실상 적이었고, 중국 국민당중화민국 정부가 오히려 후원자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한국을 도왔다고 나오지만 사실 그 중국은 지금의 중화민국(대만)이다. 오히려 중공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상대로 조선인민군과 같이 싸운 실질적 적군이다. 냉전 이후 지금도 한중관계는 긴장 속에 있다.[22] 물론 김구 선생, 김규식 선생은 사적으로 저우언라이와 같은 공산당내 온건파와 사적인 친분은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 장징궈중국 국민당의 주요 인사들과 더 친분이 있었다.[23] 실제로 바이두에 "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 물론 이런 댓글만 조직적으로 다는 공산당 관련자들도 있겠지만.[24] 그래서인지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020년 중국을 개방개혁으로 이끈 같은 당 출신 닉슨의 정책을 변화하지 않는 중공의 집권만 강화시켜줬다며 비판하기도 했다.#[25] 당장 중국 인터넷에서조차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댓글들은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안가 지워져서 그렇지..[26] 쌍백운동 시절에 잠깐 허용해준 적은 있었다.[27] 중국은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중국의 행정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가행정조직/중국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28] 그러나 이 파벌 통치도 옛말인게 2018년 3월 시진핑이 완전한 종신 독재를 선언하면서 저 돌아가면서 하는 파벌 통치끝났다.[29] 부책인은 중국어로 책임자이다. 책임(责)을 부담(负)하는 사람(人)이란 뜻.[30] 실권은 마오쩌둥이 쥐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문서의 쭌이회의 참조[덩] A B C D 실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31] 천안문 사태로 내려온다.[32] 말이 정치국원이지 총리급으로 예우하는데 우리나라로 본다면 사법부의 수장이다.[33] 우리나라로치면 국방위원회 간사정도 된다.[34] 한국의 대통령직속 자문위원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5] 당원의 영입과 교육을 담당한다. 쉽게 말해서 인사관리.[36] 민주당파(위성정당), 무소속 인사, 종교계 인사, 해외 인사와의 연계를 담당하는 기구. 쉽게 말해서 중국 공산당에 예속(당원은 아니지만 공직자인 사람들도 포함)되지 않은 중국인들(대만인들도 중공 입장에서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포함)과의 연계를 담당한다고 보면 된다.[37] 중국 공산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38] 후진타오는 공청단 후배인 리커창을 차기 대권후보로 밀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견제 때문에 결국 시진핑 국가주석, 리커창 국무원 총리 체제로 결론이 났다.[39]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려면 지방 행정 실무 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시진핑만 하더라도 허베이, 푸젠, 저장성 등을 거쳤다. 이렇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주재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오를 수 있는 직위가 장관급이 한계이다.[40] 보시라이의 아버지[41]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급의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개국공신 보이보의 아들)는 7인에 뽑히는 것이 유력했으나, 2012년에 비리로 몰락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시진핑의 집권을 도왔는데, 태자당 내 유력 주자 한명이 날라가면서 당 중앙위의 태자당의 표가 분산되지 않고 시진핑으로 집결된 것이다. 보시라이 몰락 이전의 시진핑은 당내 예상 서열이 높아봐야 4-5위 정도로 상무위원 선출도 턱걸이었다.[42] 中华人民共和国是工人阶级领导的、以工农联盟为基础的人民民主专政的社会主义国家 :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 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43] 하지만 후술된 인권 탄압 부분에 서술되어있듯 정작 노동운동가들조차 탄압하는 지금의 중공은 자기들이 만든 헌법대로도 안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44] 물론 이 나라들에서 반대로 현 중국을 평가해보라고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의 맹점은 긍정적인 사례에 대해선 눈감고 부정적인 사례만 강조한다는 것이다. 허나 현실은 권위주의 체제로 쇠퇴한 나라가 더 많고, 선진국은 대개 민주주의 국가이고, 결국 이걸 못한다는건 스스로 사회 수준이 열등하다는 걸 자인하는 자충수가 된다.[45] 그렇기에 일본처럼 일당 우위 정당제인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비판을 받는다. 사실 소수정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양당제 역시 마찬가지로 비판을 할 수 있다. 고로 유럽에선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 같은 제도도 나오는 것.[46]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일당 우위와 정치적 무관심으로 비판을 받는 일본 정치계의 다수 여당인 자민당 조차도 의석 점유 비율이 60.9%(283석/465석)다.[47] 이미 중공은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이용해 북한이탈주민들을 강제 북송하고 있다. 물론 이는 이들을 받아주는 국가가 별로 없다는 서글픈 현실도 있지만.[48] 즉, 종교의식이나 친목회 같은 집회도[49] 현재 홍콩/마카오, 대만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파룬궁은 자살 신호나 마찬가지다. 중국 본토에서 파룬궁에 소속되어 있거나, 파룬궁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관되어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혹시라도 중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체류 중에 파룬궁의 ㅍ도 꺼내면 안 된다. 그것과 비슷한 발음도 무조건 기피해야만 한다. 파룬궁의 ㅍ이라도 입에 올리는 순간 납치되어 살해되는 수가 있다.[50] 다만 파룬궁은 사이비 종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오히려 본격적인 탄압 이전엔 인민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 하여 중국 정부로부터 여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의 숫자가 공산당원 숫자를 넘어가자 뜬금없이 이들을 권력의 위협이 되는 반체제 집단으로 지명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상무위원 6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이를 실행한 것으로 아래 나오는 시진핑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 본인들의 언급과는 달리 시스템에 굉장한 허점이 있다고 밖엔 볼 수 없는 사례이다.[51] 실제로 쑨원은 자신의 정치활동이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2] 이 규제에 따라 향후 중국 내 모스크는 중국식 기와 지붕으로 지어져야 한다.[53]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가정 재교육 운운하는것,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이슬람을 믿지 말라고 명령 받았으면 그 말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압권이다.[54] 1가구 1자녀이던 시절, 소수민족은 2자녀까지도 허용되었지만 위구르족들은 그 이상으로 낳아도 별 문제 없다.[55] 참고로 위구르의 무슬림은 튀르크계 무슬림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중동의 광신교 이슬람 근본주의하고는 거리가 멀다. 에초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초창기때부터 술이나 담배를 아무렇지나 않게 했으며 지금도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을 보면 알겠지만 말로만 이슬람이지 거의 무종교인에 가까울정도로 세속적으로 살고있다 어쨋든 공산당의 탄압으로 인해 근본주의만 늘고있다....[56] 비슷한 사례로는 프랑스라이시테가 있다 다만 라이시테는 중국에 비하면 훨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으며 사생활까지 침투하는 중국과 달리 비종교적인 공공장소에서 종교색만 들어내지 않으면 딱히 뭐라 하지도 않는다.[57] 괴작 노래 <시집 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에 의하면 호랑이건 파리건 다 때려 잡는다고 한다(...). 파리는 소규모 부패 사범, 호랑이는 거물급 부패 사범을 의미한다.[58] 반대로 말하면 정상간 의제급으로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별로 없다.[59] 다만 고구려 이슈는 중국에서도 한국 측의 반발로 예전보단 좀 죽은 이슈긴 하다. 오히려 말갈족이 핵심 세력이었던 발해가 더 갑론을박이 많은 편.[60] 기사에 의하면 동북아역사재단이 지난 2006년 설립 이후 외교통상부를 통해 중국 역사 왜곡 시정을 요청한 건은 총 29건으로, 이 중 시정된 것은 12건에 불과하다.[61] 쉽게 말하자면, 인민일보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말해준다면, 환구시보는 공산당이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나 국내, 국제적인 반발을 의식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비교적 자극적인 논조로 말해준다고 보면 된다.[62] 국군만 올라오는건 민족간 내전으로 보고 참전하지 않겠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 국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물자지원을 받는다 쳐도 단독으로 북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을지는 논쟁의 대상. 인구야 당시에도 대한민국이 거의 2배 더 많긴 했지만 북한은 그런 열세를 뒤집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려온거라..[63] 사실상 일당제 내 계파간 견제와 싸움이란 점에선 일본의 자민당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실제 일당제 내에서도 계파간 견제가 이뤄질 순 있다. 하지만 다당제만큼의 견제 특히 지속적인 견제는 당연히 안되기 때문에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다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 사실상 양당제 등의 문제가 있어서 계속 제도적 수정, 보완이 이뤄지는 중.[64] 실제 도올은 중공의 일당독재를 어느정도는 긍정적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도올은 진보 성향 학자라고 알려져있지만, 일반적인 진보 학자들과는 다르게 민족 정기를 위해 징병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발언도 하는 등 꽤나 보수적인 견해도 비추는 학자이다.) 하지만 시진핑 이후 일인독재가 되어버렸다며 시진핑에 대해선 굉장히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친 바 있다.[65] 중국내 일각에선 중국이 민주주의 도입 못하는 이유로 미국을 제쳐야 되기 때문이란 황당한 주장도 한다.[66] 잡지 자체는 1915년부터 발간했다.